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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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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령 이씨는 황해도 재령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는 문하시중과 국왕의 부마를 배출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6명, 무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 임진왜란 때 이운룡은 이순신의 부장으로 활약했으며,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이한익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재령 이씨는 여러 파로 분파되었으며, 김포파, 청도파, 밀양파, 근재공파, 율간공파, 사의공파 등이 있다. 주요 인물로는 이맹현, 이현일, 이용태, 이재오, 이문열 등이 있다. 전국에는 재령 이씨 종친회가 있으며, 부산 종친회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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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오는 민주화 운동가 출신으로 보수 정당에서 5선 국회의원과 특임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그의 경력은 다면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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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이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선왕조 어보
조선왕조 어보
관향황해도 재령군
시조이우칭(李禹偁)
중시조이소봉(李小鳳)
로마자 표기Jaeryeong Lee
집성촌
인구 통계
2015년54,166명
순위140위
주요 인물

2. 역사

재령 이씨는 고려 수도였던 개성에 많이 살았으나, 고려 멸망 후 사재령공을 중심으로 경남 밀양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2]

사재령공의 넷째 아들인 성균관 진사 모은공(慕隱公) 이오는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안 모은리(慕隱里)로 내려가 고려동학(高麗洞學)이라는 비를 세우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야은 길재는 이오에게 벼슬에 남아 있을 것을 권유했으나, 이오는 이를 거부하였다. 모은공은 후손들에게 자신으로부터 3대까지는 벼슬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만은공 재, 모은공 이오, 금은공 열 3인은 고려 관료로서 나라가 망하자 은거하며 합천 해인사 아래 동네에 자주 모였는데, 그 마을 이름이 삼가 마을이 되었다. 1414년 조선 태종 14년 삼가현(三嘉縣)이 생겨났고, 1786년 조선 정조 10년부터 운구서원을 건립하여 이 3인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우칭은 재령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중시조 상장군(上將軍) 이소봉(李小鳳)은 공민왕의 부마(駙馬)였다. 이소봉의 두 아들은 중랑장(中郞將) 이일상(李日祥)과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이다.

사헌부 지평 이신은 좌상시 김진양과 함께 상소하여 조준을 심하게 논하였다고 한다.[1]

임진왜란 때 식성군 이운룡이순신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조선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한 이한익은 여러 관직을 거쳐 진해 웅현 현감과 기장 현감을 지냈다.[3]

2. 1. 고려 시대

재령 이씨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많이 살았으나, 고려 멸망 후 사재령공을 중심으로 경남 밀양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2]

사재령공의 넷째 아들인 성균관 진사 모은공(慕隱公) 이오는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안 모은리(慕隱里)로 내려가 고려동학(高麗洞學)이라는 비를 세우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오는 야은 길재에게서 벼슬에 남아 있을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였다. 모은공은 후손들에게 자신으로부터 3대까지는 벼슬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만은공 재, 모은공 이오, 금은공 열 3인은 고려 관료로서 나라가 망하자 은거하며 합천 해인사 아래 동네에 자주 모였는데, 그 마을 이름이 삼가 마을이 되었다. 1414년 조선 태종 14년에는 삼가현(三嘉縣)이 생겨났고, 1786년 조선 정조 10년부터 건립한 운구서원에 이 3인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2. 1. 1. 문하시중과 고려국왕의 부마

이우칭은 경주 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6세손으로 고려조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재령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중시조 상장군(上將軍) 이소봉(李小鳳)은 공민왕의 부마(駙馬)였다. 이소봉의 두 아들은 중랑장(中郞將) 이일상(李日祥)과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이다.

2. 1. 2. 사헌부 지평

사헌부 지평 이신은 좌상시 김진양과 함께 상소하여 조준을 심하게 논하였다고 한다.[1]

2. 2.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식성군 이운룡이순신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조선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한 이한익은 여러 관직을 거쳐 진해 웅현 현감과 기장 현감을 지냈다.[3]

2. 2. 1. 임진왜란

식성군 이운룡임진왜란이순신의 부장이었다. 노량 해전에서 총탄에 맞은 이순신을 대신해 병력을 지휘하였다.[1]

2. 2. 2. 영조, 정조 시대

자는 성은(聖恩)을 쓰던 휘 한익은 조선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나[3] 관직을 받지 못하여 병조 판서를 직접 찾아가서 관직을 요구하여 첫 관직을 임명받았다. 전중 시어사, 승선을 지냈으며, 문숙공이 자주 그의 뛰어남을 칭찬하였다.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노년에는 진해 웅현 현감으로 재임을 마치고 기장 현감으로 재임 시기에 병으로 사망한다.[3] 기장으로 좌천되어 내려온[4] 시랑대가 유명한 이조참의 권적[5]에 관한 현감 공적비[6]가 존재하는 지역이 기장이다. 기장 현감공은 무관이었으나 현감으로 부임한 고을마다 잘 다스려서 고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3]

3. 분파

분파
김포파(惠)김포파(단활재공파)
청도파(天龍)청도파(식성군파)
청도파(司正公 戌)청도파(사정공파)
밀양파(生員公 丑)밀양파(생원공파)
근재공파(孟賢)면천파(교리공파), 인천파(감찰공파), 양주파(현감공파), 진주파(판관공파), 영해파(현령공파), 원주파(진사공파)
율간공파(仲賢)김해파(사직공파), 함안파(덕고공파)
사의공파(季賢)창원파(첨지공파), 진주파(통정공파), 하동파(주부공파), 함안파(처사공파)


4. 주요 인물


  • 이맹현(1436년 ~ 1487년): 성종 때 장령, 응교, 부교리 등을 거쳐 1477년(성종 8) 직제학, 부제학을 역임하고, 1480년 이조참판, 1483년 나주목사를 지냈다.
  • 이현일
  • 이인호: 진주시 교육지원청 초대 교육장, 하동군수, 양산군수, 산청군수, 창원군수, 경상남도 인재개발원장, 밀양군수를 역임했다.
  • 이용태: 유타대학교 통계물리학 박사. 1981년 한국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PC)를 출시해 상용화했다.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데이콤 사장을 역임했다.
  • 이재오
  • 이동훈: 상공자원부 차관, 공업진흥청장, 초대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남해화학 사장, 한국전화번호부 회장,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 이문열: 나본을 각색한 중화민국 모본 《삼국지연의》 번역서로 국내 최다 판매본 기록을 세웠다.
  • 이호섭(1959년 9월 12일 ~ ): 대중가요 작곡가. 한국가창학회 회장.
  • 이동룡: 기아 부사장, 기아 인재개발원 원장을 역임했다.
  •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 이재동(1995년 12월 3일 ~ ): 요들러, 알펜로제 어린이 요들단 단장, 스위스 탄산수 메인 보컬
  • 이유진: 히든싱어 에일리 편 출연, 전국노래자랑 부산 금정구 편 우수상 수상

5. 본관

재령(載寧)은 황해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식성(息城 : 漢城, 乃忽, 漢忽)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하였다가, 907년(효공왕 11)에 안주(安州)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방어사를 폐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으며, 예종(睿宗)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217년(고종 4) 거란병의 침공을 막은 공으로 재령(載寧)으로 고치고 현으로 승격하였다.

6. 기타

전국 각지에 재령 이씨 종친회가 있으며, 부산종친회가 가장 규모가 크고 60년이 넘어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진주 종친회와 서울 종친회는 30년 정도 되었으며, 서울 종친회는 서울로 상경한 재령 이씨들이 세웠다.[1]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삼가현은 삼가면으로 남아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운구서원에서 고려 관료 3인에게 지내던 제사는 현재 지내지 않는다.

6. 1. 종친회

전국 재령 이씨 종친회들 중 부산종친회가 가장 크며 결성된 지 60여 년이 넘었으며, 진주 종친회와 서울 종친회는 30년 정도 되었다. 서울 종친회는 서울로 올라온 재령 이씨들이 세웠다.[1]

6. 2. 삼가현과 운구서원

조선 태종 시기에 만들어진 지명인 삼가현은 삼가면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반면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운구서원에서 고려국 관료 3인을 향한 제사는 현재 지내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효자도 제2권 > 이신부토(李申負土) http://db.sejongkore[...]
[2]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창(義倉)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3] 서적 조선환여승람 (진주) 금호출판사 2006-02-10
[4] 뉴스 [주경업의 부산에 살다] 기장 시랑대 https://www.busan.co[...] 부산신문 2015-08-19
[5]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적(權𥛚)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6] 웹사이트 부산지명총람 제7권 기장군(Ⅰ)-기장읍·장안읍- 편 http://www.busandabo[...]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10-10
[7] 인물 재령 이씨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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